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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학부] NID동아리 특강 - 모더니즘, 수학적 사고에 의한 철학과 디자인
학과 특강
소속 디자인학부작성일 2025-01-22 14:31

안녕하세요!

한양사이버대학교 디자인학부입니다.

 


24년 12월 20일 pm 8:00에 한양대학교 HIT관 2층 대강의실에서  

김학민 교수님과 40명의 학우님들이 모여 진행되었습니다. 


이번 특강의 주제는  모더니즘수학적 사고에 의한 철학과 디자인

:비트켄슈타인의 언어철학과 국제주의 세계국제주의 디자인 이었습니다


어디서도 보고 들을수 없는 김학민 교수님만의 명품 특강! 지금부터 소개해 드릴게요. 




이 몬드리안의 그림은 데스틸 (De Stijl)운동의 초기이며, 독일의 바우하우스에 영향을 주었다는것 알고 계셨나요? 

직선 개념의 등장으로 세상을 바꾸어 놓은 몬드리안은 가로선 지구상의 평평한 것세로선 땅에 서있는 모든 것

이라는 의미와 함께 직선을 사용하고세상의 모든 색을 만들 수 있는 삼원색만을 사용하여 그림을 완성하였는데요.

이전 아르데코에서 사용하던 곡선을 뒤엎는 직선의 등장으로 국제주의가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몬드리안에게 영향을 받은 1923년 예술과 기술이라는 타이틀로 개최된 바우하우스의 전시 포스터입니다.

대상에 대한 표현방식이 사물을 직접 묘사하는 것에서 직선과 기하도형으로 바뀌어 나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몬드리안의 그림을 시초로 철학과 더불어 수리 철학도 발전하게 되는데

수리철학의 대가인 러셀과 프레게가 등장합니다.





러셀은 수학은 진리만이 아니라 조각품처럼 냉철하고 엄격한 아름다움도 가지고 있다라고 했고

프레게는 산술의 법칙보다 더 객관적인 것은 없다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이때 이 두 사람에게 영향을 받은 오늘의 주인공비트켄슈타인이 등장합니다



비트켄슈타인은 오스트리아 출신 갑부였던 아버지 밑에서 자라났습니다.

비트켄슈타인의 집은 너무 커서 이 아닌 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유럽 전체를 아우르는 대부호였던 비트켄슈타인의 집안의 거실에서는 클림트슈프라우스 등등의 

예술가들이 모여 파티도 하고 비트켄슈타인과 형제들에게 교육도 해주었다고 합니다




비트켄슈타인은 5남 3녀 중 막내였으며유대인이었는데요.

형제들 모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으나정신적으로는 불안정하였다고 합니다.

비트켄슈타인은 아버지의 권유로 과학기술고에 진학하게 됩니다.

과학기술고에서 그는 기계항공공학 등을 배우며 항공기 엔진 디자인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하며

수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 하나비트켄슈타인과 히틀러는 같은 학교같은 반 학생이었습니다.

히틀러가 2차 세계 대전 때 유대인을 몰살했던 것은 독일 민주주의의 기반이었던 

유대인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라고 하는데

같은 반이었던 비트켄슈타인에게 경계심이 있어서 그랬다는 일화가 전해진다고 합니다.



수학에 관심이 생긴 비트켄슈타인은 프레게를 찾아갑니다.

그러나 그의 재능을 감당하기 힘들었던 프레게는 비트켄슈타인을 수리철학의 대가였던 러셀에게 소개해줍니다

이후 비트켄슈타인은 캠브릿지에서 러셀의 강의를 청강하며 철학을 공부하게 됩니다.

몇 년 후, 비트켄슈타인은 더 이상 세상에 배울 게 없다며, 

개인적인 사색의 시간을 보내려 홀연 노르웨이로 운둔 생활을 하러 떠납니다.



그러던 도중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데요.

정신적으로 불행했던 형제들과 같이 비트켄슈타인도 자살 충동에 휩싸이는 등 정신적으로 불안한 상태였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함과 동시에 비트켄슈타인의 자살 충동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주었고

군대에 자원입대하여 정찰대척후병 등의 중책을 맡으며 누구보다 용감하게 싸웠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특진도 하고 훈장도 받았다고 하니 그의 용감함을 실감할 수 있겠습니다




전쟁 도중에도 노트를 가지고 다니면서 글을 작성하던 비트켄슈타인은 

그만 포로로 잡혀 10개월간 수용소 생활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논리철학 논고]를 집필하게 되는데 

수용소에서 정리된 [논리철학 논고]의 원고는 러셀에게 전달되어 출판되었습니다.

비트켄슈타인은 다방면에 뛰어났던 고전형 천재로 1차 세계대전 이후
31살의 나이에 시골로 내려가 초등학교 교사가 됩니다.

이후 건축을 시작한 비트켄슈타인은 비트켄슈타인 하우스를 짓는데 현재의 불가리아 대사관입니다

이 비트켄슈타인 하우스는 직선과 기하도형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모더니즘 그 자체였습니다.




비트켄슈타인은 아돌프 로스와 교류하며 모던 디자인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후 비트켄슈타인은 본인 원고의 오역 등의 이유로 캠브릿지로 돌아왔습니다

케인즈가 마중 나오며 그의 귀환을 환영했고비트켄슈타인은 다시 철학적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습니다.

비트켄슈타인은 이번에도 전쟁에 자원입대하였는데이번에는 위생병으로 참전하였습니다. 

이후 다시 노르웨이에 잠적했던 비트켄슈타인은 무어와 러셀의 권유로 박사학위논문을 제출합니다.

이후 비트켄슈타인은 61세의 나이에 암질환으로 사망하였습니다.




비트켄슈타인은 다른 철학자들보다 사진 자료가 많은 편인데요여기에서도 그의 재력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4대 문명이 중요했던 이유는 문자가 개발되었다는 것이고비트켄슈타인은 언어체계가 세계의 본질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최근 AI로 작업하는 작업물들이 많아지면서 프롬프트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예시로 Chat GPT.의 경우 명령어를 잘 입력해야 원하는 결과물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그 언어의 한계가 그 작품의 한계가 되는 만큼 여러분들도 언어에 대한 능력도 꼭 같이 향상시키시길 바랍니다.


길지만 알차고 소중한 강의 내용이 여러분들에게  좋은 자극제가 되었길 바라며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한양사이버대학교 디자인학부 
정주혜 조교(02-2290-0469)